수행 한담

방생의 중요성과 기적 같은 실화

석암 최영훈 2012. 7. 23. 19:23
중국에서 방생을 한 후 생긴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방생하는 현장에 계속해서 방광 현상이 생기고 있습니다 

<<클릭한 후 10초후에 본 동영상이 나옵니다...>

바로 작년(2010년) 추석... 중국의 어느 강변에서  방생기도회를 열었는데 
불가사의한 현상이 이 날 참가한 수 많은 불자들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동영상]이 정확히 1분38초후부터 방생한 "물고기보살님"들이 마치 국경일에서 시실한 
열병식(閱兵式)처럼 각종 열대(列隊)공연장면를 연출하여 당시 모였던 모든 불자들이... 
이 감동적이고 수승한 광경를 목격하고 시종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를 외치면서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가피와 영험을 체험하였다...!!!
{一切衆生皆有佛性}-"세상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를 지니고 있다"...라는 부처님의 성도한 순간의 
말씀이 입증한것처럼 전혀 영성(靈性)이 없는줄 알았던  물고기(봉어,잉어)들이 방생의 

은혜를 보답코져 *추석날에 먹는 월병(月餠)을 상징한 "원형"와 "만사형통"의미를 담긴 "6"자를 그리면서 대열를 형성하여 지성감은(至誠感恩)한것이다~~~!!!

나는 1년 전부터 방생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5년 전 처음
 방생이라는 것을 한 후 1년 전부터는 방생을 매달 실천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방생할 수 있는 곳이 한정돼 있는 관계로 (김포 대명포구 )
매달 실천을 못하는 것은 그달의 방생비를 적립했다가 한꺼번에 하고는 한다 
이 세상에 생명을 살려주는 것 만큼 큰 공덕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생명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한낱 미물일지라도 그 공덕은
 무엇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사찰에서 단체로 하는 방생법회는 수질 오염 생태계 파괴 
방생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여러가지 행태등으로 지금은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방생만큼은 우리 인간들이 
관심을 가져야할 자비행의 실천이다 
많은 분들이 방생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자비행을 실천하라고 한다 
물론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나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방생과 이웃을 돕는 자비행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들은 대다수가  살생의 업속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해충이라고 생각하는 파리 모기 바퀴벌레 
그리고 그 외 많은 미물들의 생명을 알게 모르게 그 얼마나 해쳐왔을까 
그 악업을 속죄하고 참회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건
 바로 방생의 실천일 것이다  
살생의 업이 많은 사람들은 단명을 하거나 수많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저런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한 번쯤 병고의 원인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부처님과 용수보살께서도 작은 벌레 한 마리를 
죽인 업으로 질병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도 그럴진데 하물며 우리 같은 중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렇기에 방생도 중요하지만 절대로 살생을 하면 안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금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신을 위한 행위인 것이다 
40년 전 어느 선원이 항해 도중 바다로 추락해 죽을 목숨을 거북이가
 나타나 선원을 등에 태워 생명을 살려준 일이 있다 그것이 
매스컴에 기사화 되고 방송되지 않았다면 
말로만 전해졌다면 과연 그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선원의

어머니가 불자로서 평소 방생을 생활화 했던 분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병든 이를 치료해 주는 것만큼 큰 공덕이 없다고 하셨다
 하물며 생명을 구해준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는가 
요즈음  스님들이나 불자들도 실질적인 방생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인간방생을 더 권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물일지언정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만큼 
더 큰 은혜는 없다는 것을 우리 불자들이 명심했으면 하는 것이다 

※아래의 글이 그 당시 신문에 난 기사다

 

 

그의 어머니는 절에 열심히 다니며 배를 타고있는 아들을 위해

항상 불공을 극진히 드리며 방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경향신문 기사 (1969년 8월 20일)를 보면 어머니 강현희씨가

 

남항동 딋산 성암사에서 매달 자식을 위하여 불공을 드렸다 합니다.

 


 


당신이 진짜 그랬어?" 김정남 씨가 48년 전 거북이 등에 타고 구조된

당시 상황을 상세히 이야기하자 아내 김창숙 씨가 신기해하며

그 시절 신문을 펼쳐보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원양 선원 중에 거북이 등에 타고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대요.

" "에이, 설마."
누구나 처음 이 얘기를 들으면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거짓말! 진짜요?" 올해 본보가 원양어업 60주년 연중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보니,별별 사연,

별별 제보들이 다 모여든다. 거북이 사나이 얘기도 그중 하나였다.

믿기 힘들어 검색해보니, 1969년 8월 24일 실제 남미

니카라과 앞바다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국내 언론뿐 아니라

외국 언론도 당시 사건을 떠들썩하게 다뤘으니 분명 지어낸

얘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연세가 제법 많으실 텐데 살아 계실까? 부산에는 살고 계실까?'


1969년 일본 상선 승선  
파나마 근해서 실족해 표류  
물 위로 올라온 거북이 잡고  
17시간 만에 기적 같은 생환  

아폴로 11호 달 착륙과 함께  
세계 10대 뉴스 후보로 거론
 

"김. 정. 남. 씨. 를. 찾. 아. 라" 

이곳저곳, 며칠을 수소문한 끝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김정남 씨 찾았습니다." 서울뿐 아니라 미국이라도 만나러 갈

태세였지만,다행히 김 씨가 사는 곳은 부산이었다. 당장

약속을 잡아 부산 서구 암남동에

사는 그를 만났다. "15시간 가까이 바다 한가운데서 헤엄을 쳤으이

너무 힘들었지. 이래 죽는구나 했지. 근데 뭐시 배 밑에서

쑤욱 올라오는기라.숨소리 같은 게 나더라고. 응급질에 엄마야

하고 붙잡았지. 눈 떠보이

거북이더라고. 잡을 때는 몰랐지. 잡고 보이께네 거북이라." 

김정남(75) 씨는 48년 전 일이 아직도 생생한 듯 며칠 전 일처럼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때 내가 탄 일본 상선이 일본에서 뉴욕으로

가는 길이었지. 파나마 들어가기 하루 전날. 동료들끼리

술 한 잔 하고 더버서 갑판 쪽에 나왔는데 갑자기

롤링이 심해져가 물에 빠진기라. 새벽 1시 반인가 떨어졌는데,

그다음 날 오후 5시까진가 떠밀려 다녔지." 
김 씨는 당시 운동한 몸이라 버텼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라고 했다.


더욱이 김 씨가 빠졌던 해역은 상어떼가 득실대는 바다였다. 
2시간여가 지났을까. 기력을 잃고 거북이 등에 쓰러진 김 씨에게

또 한 번 기적이 찾아왔다. 저 멀리 스웨덴 선적의 배 한 척이 나타난 것.

화물선 '시타델 호'에 타 있던 항해사는 그를 못 봤지만, 아래에서 일하던

선원이 그를 발견했다. "배가 저 수평선에 뜨는데 내하고 딱 일직선이더라고.

아차, 살았구나 싶어 내가 고함을 질렀지. 손을 흔들고." 그가 살아날

운명이었던지, 마침 선원들은 일할 시간이 아닌데도 '오버타임'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는 고마운 거북을 잘 가라고 밀어주고,

선박을 향해 있는 힘껏 헤엄쳐 나갔다.

시타델 호에 구조된 김 씨는 미국 LA로 들어갔고 뉴욕타임스 호외에

기사가 실리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한국에도 곧 이 소식이 타전됐다. 한국에서는 김 씨 어머니가

하루도 빠짐없이 용왕제를 지낸 덕에 김 씨가 전래동화 속 주인공처럼

살아났다고 했다. 
"어머니가 매일 용왕제를 지내셨나 봐. 그리고 예전에 아버지가

어선을 한 척 몰았는데 촌에서. 거북이가 한 마리

그물에 걸리더라네. 그 거북을 술을 먹여 보냈대. 그래 그때는

술을 먹여 보내면 좋다 해서 그랬다네.

근데 아버지 말은 가면서 그 거북이 계속 돌아보더래.

몇 번을 돌아보더래.그러이 미신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지 나는.

" 영도 영선사에 가면 김 씨

어머니의 공덕을 그린, 공덕비도 아직 있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도 상선 선장으로 배를 몰았던 그는 선원들에게

산 고기 잡지 말라,낚시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지금도

아내와는 정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막걸리와 북엇국을 끓여 용왕제를 지낸다고.
당시 이 사건은 UPI, API 등 세계 유수 통신사에 의해 세계로 전해졌는데,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과 함께 10대 뉴스 후보로도 거론됐다. 
이후 김 씨는 한국에서 10대 가요제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거북이표' 비누 회사에서는 평생 비누를 주겠다고 약속해오기도 했다.

이후 비누 회사는 없어졌다. 

지금도 그는 동네에서 '거북이 아저씨', '거북이 형님'으로 통한다.

"넘한테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지. 근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되네.

(허허) 그래도 항상 그 기적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지."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1년 전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방생할 때 사진입니다